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즈 사강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youtube(PAE-27LbHWM)] 프랑수아즈 사강의 생애,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[[민음사]] 영상 [[1935년]] 프랑스 남서부 카자르크에서 출생했다. 전기 회사를 운영하는 엔지니어인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본명은 프랑스아즈 꾸아레[* Françoise Quoirez]였으나 사회적 평판을 중요시하게 여긴 그녀의 아버지가 막 탈고된 <슬픔이여 안녕>을 읽어보고는 발표 후의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며 가족의 성을 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후 필명인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활동한다. 필명의 유래는 [[마르셀 프루스트]]의 소설 [[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]]의 등장인물인 사강 공작 혹은 공작 부인. 사강은 [[리옹]]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3개월도 못 다니고 퇴학당했다. 학교에서 퇴학당한 이후 사강은 유명 [[사립 학교]] Cours Hattemer[* 1885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[[사립 학교]]. 주정부로부터 독립적인, 체계적이고 반복을 강조하는 자체 교육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. 학교의 유명한 동문으로는 여배우 [[브리짓 바르도]], 프랑스 전 대통령 [[자크 시라크]] 등이 있다.]에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독서에 임했는데 훗날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때 였다. 사강은 13살에는 [[앙드레 지드]]를, 15살에는 [[알베르 카뮈]]를, 16살에는 [[아르튀르 랭보]]를 읽기 시작했으며 이 외에도 [[윌리엄 셰익스피어]], [[장 자크 루소]], [[스탕달]], [[귀스타브 플로베르]], [[마르셀 프루스트]], [[F. 스콧 피츠제럴드]], [[어니스트 헤밍웨이]], [[장 콕토]], [[장폴 사르트르]] 등의 작가를 탐독했다. 이후 작가로서 성공한 사강은 실제로 이들 중 생존해있는 몇몇을 만나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. 특히, 사강은 사르트르가 사망하기 1년 전 부터 열흘마다 한번씩 그와 식사를 같이했다. [[1951년]] 사강은 가족과 함께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이주했고 [[1952년]] 가을, 재수 끝에 [[바칼로레아]] 시험에 통과하여 대학평준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인문과학대학인 [[소르본 대학교]]에 입학했다. 그러나 대학 입학 후 사강은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양가의 처녀로는 발디딜 곳이 못되는 [[카페]]에 자주 드나들면서 [[담배]]를 피우고 [[위스키]]를 마시며 [[재즈]]를 즐겼으며[* 이를 두고 사강의 어머니는 딸의 행동이 들개 같다고 탄식했다고 한다.] 결국 [[1953년]]에 개강한 첫 학기에 [[학사경고]]를 받고 만다. 한편, 그 해 여름에 바캉스를 즐기다 [[요트]] 사고를 당한 사강은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6주만에 소설 <슬픔이여 안녕>을 썼고 여러 출판사에 자신이 쓴 원고를 보낸다. 출판사 쥘리아르의 편집자 르네 쥘리아르는 그녀가 투고한 원고를 보고 전에 자신의 출판사에 큰 돈을 벌어준 적이 있는 [[레몽 라디게]]의 면모를 발견했고 이 소설을 출판하기로 계약한다. 이 때 사강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2만 5천 프랑을 선인세로 요구했는데 쥘리아르는 오히려 그 두 배에 해당하는 5만 프랑의 선인세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.[* (프랑수아즈 사강의 삶 - 트리스탕 사뱅, 2008년 <렉스프레스>[[https://www.lexpress.fr/culture/livre/francoise-sagan-dernieres-revelations_813581.html|#]])] <슬픔이여 안녕>은 [[1954년]] [[3월 15일]]에 발표되었고 1954년 한 해에만 50만부가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비평가상 까지 받게 된다.[* [[조르주 바타유]], [[마르셀 아를랑]], [[모리스 나도]], [[장 폴랑]], [[로제 카유야]]가 당시 비평가상의 심사위원으로 있었다.] 비평가상 수상 당시 사강은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상금 10만 프랑을 수표가 아니라 전액 현금으로 받아야 했다.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설의 여주인공인 10대 소녀 세실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묘사 때문에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이 이 소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. [[바티칸]] 당국은 "독과 같은 이 책을 젊은이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."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. 이후 그녀는 대학을 정식으로 자퇴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을 시작, <어떤 미소 ([[1956년]])>, <한 달 후 일 년 후 ([[1957년]])> 등을 연달아 발표했고 이 작품들이 모두 인기를 끌면서 사강은 천재 소녀라 불리우며 "사강 신드롬"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주목받는다. [[1958년]]에는 '슬픔이여 안녕'이 [[진 시버그]]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고 사강은 마침내 [[1959년]], 그녀의 대표작이자 프랑스 현대소설의 대반향으로 손꼽히는 <브람스를 좋아하세요...(Aimez vous Brahms...)>를 발표한다. 60년대부터는 소설보다 [[희곡]] 집필에 몰두했다가 80년대부터 다시 소설을 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. 한편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은 "매혹적인 작은 악마"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온갖 비행을 일삼기도 했다. 첫 소설 '슬픔이여 안녕'이 비평가상을 탄 후 상금으로 10만 프랑을 받자 [[재규어(자동차)|재규어]]사의 [[스포츠카]]를 산 것을 시작으로 여러 스포츠카를 구입하여 과속으로 드라이브를 즐가다가 [[1957년]] [[4월]], 자신이 소유한 [[애스턴 마틴]]의 스포츠카를 시속 160km의 속도로 몰던 도중 교통사고를 냈고 이 때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 [[모르핀]]에 중독되었다. 모르핀 중독에 못이겨 이후 그녀는 약물 중독에 여러 번 빠졌고 과도한 음주로 죽음 직전까지 간적도 여러 번이었다. 사강은 [[1964년]]에 발표한 첫번째 자서전 <독약(Toxique)>에서 자신의 모르핀 중독을 털어놓았다. 이외에도 [[1956년]], 21살의 나이로 [[카지노]]에 처음 출입한 후 도박에 중독되어 수 많은 재산을 탕진했으며 급기야는 정부에 자신의 카지노 입장 금지를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다. 사강의 비행이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자 [[1978년]] 극우 정치가 [[장마리 르 펜]]은 "사강을 단두대에 보내야 한다"고 까지 말했다. 80년대 들어서 그녀는 재기하여 [[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]] 당시 대통령으로 당선된 친구 [[프랑수아 미테랑]]과 함께 정치 개혁에 뛰어들었고 미테랑 재임 시절에 지식인으로서 사회 현안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.[* 당시 [[엘리제 궁전]]의 문화 고문이던 아들러는 사강과 미테랑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. "사강과 미테랑은 몹시 가까웠습니다. 두 사람은 종종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다녔지요. 어느 날은 그녀가 늦게 도착해 대통령을 비롯한 수행원들을 기다리게 했는데 미테랑 대통령은 그런 일을 매우 재미있어했습니다. 두 사람은 연인 관계와는 다른 의미에서 아주 친밀했어요. 미테랑 대통령은 사강의 책을 전부 읽었답니다." (프랑수아즈 사강의 삶 - 트리스탕 사뱅, 2008년 <렉스프레스>[[https://www.lexpress.fr/culture/livre/francoise-sagan-dernieres-revelations_813581.html|#]])] 사강은 프랑스에서 인신 보호 영장 청구권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큰 기여를 했고 교도소 개혁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. 한편으로 사강은 [[1984년]]에 발표한 에세이 <고통과 환희의 순간들(Avec mon meilleur souvenir)>을 통해 과거 자신의 방탕한 생활상을 담담하게 묘사하여 화제를 일으켰다. 미테랑 대통령 퇴임 직후인 [[1995년]]에 [[코카인]] 소지 혐의로 체포되면서 사강은 추락하기 시작했다. 이때 그녀는 한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"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, [[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]]"(J'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.)[[https://www.humanite.fr/node/312880|#]][* 이 발언은 시간이 흘러 [[김영하]]의 소설의 제목이 된다.]며 자신을 변호했고, 이후 두 차례 기소에서 모두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. 그러나 이후 사강이 미테랑 재임시절 개발회사인 Elf의 [[우즈베키스탄]] 매장 [[석유]] 개발 관련 민원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외교부에 압력을 넣어 해소한 대가로 약 9백만 프랑 가량의 금품을 수수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[* 이 Elf 스캔들은 워낙 복잡한 사건인데다 당시 프랑스에서 화제였던지라 훗날 [[클로드 샤브롤]]이 [[이자벨 위페르]]를 기용해 [[코미디 오브 파워]]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. 다만 담당 검사가 주인공이라 사강은 언급되지도 않는다.] [[1991년]]에 불탔던,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증개축하면서 탈세한 혐의도 인정되었다. 그 결과 [[2002년]] 사강은 금고형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. 그녀의 말년은 재산 몰수로 인해 궁핍했으며, 사강의 동료들은 참작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. 그러던 [[2004년]] 사강은 심장 및 폐질환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. 사강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[[자크 시라크]] 대통령은 프랑스의 가장 감각적인 작가를 잃었다며 직접 애도를 표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